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문단 편집) === '''종교의 자유''' === 애초에 고종은 즉위 전에 생모인 부대부인 민씨에게 [[병오박해|병오년 참극의 한]]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이는 주변인들에게 자신이 빙의했다는 위화감을 더 큰 충격으로 덮을 의도로 한 일이었으나, 이런 맹세를 했다는 핑계가 있어서 천주교는 물론이고 (훗날의 일이지만) 불교에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개항을 하기 위해선 더더욱 천주교 박해를 멈춰야 했고, 프랑스를 조선의 문명화를 위한 파트너로 여겼기에 그들의 국교인 천주교 박해를 엄히 금했다. 황후인 소양공주 또한 [[티벳 불교]] 신자이기에 불교가 힘을 얻고 한성 내에 사원까지 세우자 유자들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항의했고, 잊고 있었던 이형은 휙 내던지듯 종교의 자유를 허한다. 이에 따지고 들어온 박규수 포함 유림들에게도 "백성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유림들이면 그들이 불교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쳐주면 될 것이 아닌가?" 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그들이 자청해 개화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한편 미국 순방에 나선 이하응이 자신을 환영해주는 아시아인들을 보고 감동해 마음을 고쳐먹고, 남은 여생을 서부에서 보내며 그들의 권익향상에 힘쓸 것을 결심했다. 이후 1천 명의 아시아인들과 함께 장로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것으로 대한제국 황가는 유교도(작중 언급에 따르면 이교도; 고종), 불교도(소양황후), 천주교도(부대부인 민씨, 제 2황자 이강), 개신교도(흥선대원군)로 총 4개의 종교 신도로 구성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비난하는 행위를 황실 모욕죄로 처벌하며 종교의 자유는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